면역계는 '나'를 어떻게 아는가 — 자기는 알아보는 신분증이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면역학 교과서의 첫 그림은 대개 국경수비대다. 몸속 거의 모든 세포는 표면에 일종의 신분증을 내걸고, 순찰하는 면역세포가 그 신분증을 검사한다. 내 것(자기, self)이면 통과, 남의 것(비자기, non-self)이면 공격. "너, 자기 맞아?" 이 신분증 검사가 면역의 본질이라는 것이 오래된 통념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처음부터 큰 구멍이 있다. 몸은 매일 막대한 양의 '남'을 공격하지 않는다. 반쪽이 아버지 유전자인 태아를 아홉 달 동안 거부하지 않고 키우고, 장 속 수십조 마리 세균과 나란히 살며, 매일 삼키는 남의 단백질을 견딘다. 반대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제 세포는 주저 없이 죽인다. 신분증이 진짜 축이라면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들이다. 더 이상한 것도 있다. 면역계가 무엇을 '자기'로 칠지(어떤 신분증을 통과시킬지) 자체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몸이 발생기에 배워 정한 것이다.
면역을 그리는 그림은 둘이다. 하나는 신분증 검사, "너 누구야"를 묻고 신원으로 가른다. 다른 하나는 순찰과 신고 대응, "여기 무슨 일 있어"를 묻고 상태로 가른다. 통념은 앞의 그림이지만, 면역이 실제로 하는 일은 뒤쪽이다. 그렇다면 진짜 물음은 "면역계는 나를 어떻게 아는가"가 아니다. 이 글은 그 물음이 어디서 어긋나는지 따라간다.
신분증이라는 오래된 그림
이 통념은 근거가 탄탄하다. 1950년대 말 버넷(Frank Macfarlane Burnet)의 클론선택설이 면역의 뼈대를 세웠다. 림프구는 저마다 하나의 표적에만 맞는 수용체를 미리 지니고 있다가, 딱 맞는 항원(면역세포가 알아보는 표적 분자 조각, 세포가 표면에 내거는 '명찰')을 만난 세포만 골라 증식한다. 게다가 T세포는 항원을 그 자체로 읽지 않는다. 거의 모든 세포가 상시 내걸어 제 안쪽 내용물을 조각내 전시하는 진열창, MHC(조직적합성 분자)와 함께 인식한다. 이 MHC가 이식에서 '자기 신분증'으로 대조되는 표식이다.
이 그림에는 강력한 임상 증거가 있다. 장기이식 거부다. 남의 MHC를 단 조직을 옮겨 붙이면 면역계가 그것을 '남'으로 알아보고 격렬하게 밀어낸다. self/non-self는 도식이 아니라 수술실에서 매일 확인되는 사실이다. 그러니 "면역계는 자기와 남을 분자 수준에서 대조한다"는 문장은 쉽게 반박되지 않는다. 이 통념을 세게 세워 두어야 한다. 뒤집히는 것은 이 사실이 아니라, 이것이 면역의 전부라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흉선에서 만들어진다
반전은 그 '자기 신분증'의 출처에 있다. 버넷 본인이 노벨상 강연에서 이미 짚었다. 자기를 알아보는 능력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발생 과정에서 자기를 공격할 세포를 지워 학습된다. 메더워(Peter Medawar)의 실험이 이를 증명했다. 갓 태어난 생쥐에게 다른 계통의 세포를 미리 주입하면, 자라서 그 계통의 피부이식을 거부하지 않는다. 무엇을 '자기'로 칠지가 발생기의 노출로 바뀐 것이다.
그 학습이 일어나는 곳이 흉선(가슴뼈 뒤에 있는 면역세포 연수원)이다. 새로 만들어진 T세포는 여기서 시험을 치른다. 자기 분자에 너무 세게 반응하는 세포는 골라내 죽인다(음성선택). 흉선을 살아 떠나는 세포는 소수다. 그런데 죽는 세포의 대부분은 자기반응성이라 삭제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자기 분자에 결합조차 못 해 방치되어 죽는다.
여기에 이 그림의 급소가 있다. 흉선은 자기의 청사진을 어디선가 읽어 오지 않는다. AIRE라는 스위치가 몸 구석구석의 조직에서만 쓰이는 항원들(췌장의 인슐린이든 눈의 단백질이든)을 흉선 안에 일부러 꺼내 전시한다. 거기에 과잉 반응하는 세포를 그 자리에서 삭제한다. 즉 자기란 '유전자가 지정한 목록'이 아니라 '교육 시기에 흉선에서 전시됐던 것'이다. 그래서 AIRE가 고장 나 무언가를 전시하지 못하면, 그 조직은 '남'이 되어 공격당한다. AIRE 결손으로 온몸에 자가면역이 번지는 증후군(APECED)이 그 증거다. 자기는 발견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고, 그 제작이 실패하면 자기 몸이 표적이 된다.
이렇게 자기반응 세포를 삭제해 자기를 새기는 일(뒤에서 '관용'이라 부를 것)은, 면역이 배우기 위해 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택적 망각이 학습의 조건이라는 이야기는 파국적 망각 — 뇌는 잊어서 배우고, 기계는 배운 자리에 저장하다 무너진다에서 다뤘다.
그리고 평생 다시 유지된다
흉선에서 완성되는 관용(중추 관용)은 완벽하지 않다. 발생 뒤에야 나타나는 항원, 음식, 장내 세균처럼 흉선에 없던 것들이 있고, 시험을 빠져나간 자기반응 세포도 남는다. 그래서 성체에서 이를 보완하는 말초 관용이 필요하다. 자기는 한 번 새기고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능동적으로 지켜야 한다. 이 유지를 맡는 것이 조절 T세포(Treg)다. 탈출한 자기반응 세포가 날뛰지 못하게 상시 말리는 억제 세포로, 사령탑 유전자는 FOXP3다. 이 유전자가 망가지면 전신에 자가면역이 터진다(IPEX). 관용은 '반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공격할 세포를 끊임없이 끄는 능동적인 일이다.
관용이 지키는 그 경계는 두 방향으로 무너질 수 있다. 한쪽은 자기를 남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1형 당뇨는 자기반응 T세포가 인슐린을 만드는 세포를 파괴하고, 루푸스는 제 세포의 핵산까지 표적으로 삼는다. 반대쪽은 남을 지나치게 밀어내는 것이다. 이식편이 도리어 수혜자의 몸을 '남'으로 공격하는 이식편대숙주병이 그 거울상이다.
그렇다면 '자기는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이 자가면역이라는 개념을 무너뜨리는가. 정반대다. 자기를 구성물로 보면 자가면역이 더 잘 설명된다. 자가면역은 미리 주어진 자기를 '실수로' 공격하는 사고가 아니라, 자기를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이 실패한 것이다. 흉선에서의 삭제 누락(APECED)이든, 말초에서의 억제 실패(IPEX)든. '자기 공격'이라는 임상 언어는 그대로 살아 있되, 그 자기가 지켜 내야 할 성취물임이 드러난다. 자기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매번 다시 해내는 일이다.
너 누구야가 아니라, 여기 무슨 일 있어
이제 더 큰 물음이 남는다. 자기가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그 자기가 공격과 관용을 가르는 축이기는 한가. 아니다. 앞서 본 관용의 사례들이 그것을 말한다. 태아는 대량의 '남'이지만 모체가 조절 T세포(Treg)를 비롯한 장치로 능동적으로 관용해 아홉 달을 지킨다. 장 속 세균은 사람 세포와 거의 1대 1로 맞먹는 약 38조 마리에 이르지만 공격받지 않는다. 매일 먹는 음식 단백질에는 능동적으로 견디도록 배우는 경구 관용이 걸린다. 반대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제 세포는 죽는다. 공통 규칙은 신원이 아니다.
그럼 무엇이 방아쇠인가. 여기서 두 신호 모델이 등장한다. 항원을 알아보는 것(신호1)만으로는 공격이 켜지지 않는다. 신호1만 받은 T세포는 오히려 무반응 상태(anergy)에 빠져 관용으로 기운다. 손상이나 위험을 알리는 두 번째 신호(신호2)가 함께 울려야 비로소 공격이 시작된다. 매칭거(Polly Matzinger)의 위험 모델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면역이 응답하는 것은 '남'이 아니라 다치거나 죽어 가는 세포가 내지르는 위험신호이며, 죽은 세포에서 나온 요산 같은 분자가 그 신호로 작동한다.
여기서 범위를 그어야 한다. '자기가 만들어지고 재협상된다'는 이야기는 적응면역(항원마다 새 수용체를 만들어 대응하는 T세포·B세포의 층)에 한정된다. 그 아래 선천면역은 다르다. 진화가 미리 새겨 준 수용체로 미생물에 보존된 공통 표지(PAMP)를 태어날 때부터 알아본다. 학습이 아니라 각인이고, 별개의 층이다. 제인웨이(Charles Janeway)가 보인 것은 바로 그 선천 층이 먼저 '감염 신호'를 감지해야 적응면역의 두 번째 신호가 켜진다는 것, 즉 신원이 아니라 맥락이 방아쇠라는 논거였다.
다만 그 맥락 신호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매칭거는 그것을 손상이라 했고, 제인웨이는 미생물의 패턴이라 했고, 프라되(Thomas Pradeu)는 익숙한 것과 갑작스러운 것 사이의 불연속이라 본다. 위험 모델은 self/non-self를 대체하지 못했고, '위험'이 순환적으로 정의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하나뿐이다. 항원 인식만으로는 부족하고, 맥락 신호가 있어야 응답한다. 이 글이 딛는 것은 그 잔여지 특정 이론의 승리가 아니다. 그리고 논쟁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뒤에 다시 쓸 물음을 떠받친다.
그렇다고 self/non-self가 틀린 것은 아니다. 이식거부는 그것이 실제로 작동하는 극적인 사례다. 오히려 이렇게 확인된다. 제 피부를 떼어 다른 자리에 도로 붙이는 자가이식은 상처와 염증이라는 위험 맥락이 뻔히 있는데도 거부되지 않는다. 손상만으로는 거부가 켜지지 않고, 낯선 MHC가 있어야 켜진다는 뜻이다. 외래성은 실재한다. self/non-self는 틀린 게 아니라 불완전하다. 면역의 필요조건이되 충분조건은 아니다.
축이 넘어갔다. 신원("너 누구야")에서 상태("여기 무슨 일 있어")로. 면역은 신분증을 검사하기보다 순찰을 돌며 신고에 응답한다.
철학이 이미 놓아둔 다리
자기가 실체가 아니라 관계라는 결론은, 면역학이 우연히 헛디딘 낯선 자리처럼 들린다. 그런데 낯설지 않다. 인격의 정체성을 물어 온 철학의 한 갈래가, 전혀 다른 길로 같은 자리에 먼저 이르러 있었다. 로크는 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 같은 몸이 아니라 이어지는 의식과 기억이라고 보았다. 흄은 자기라는 고정된 알맹이는 없고 끊임없이 바뀌는 지각의 다발만 있다고 했다. 파핏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체성은 있고-없고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동일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잇는 연결이라고 논증했다. 물론 이것이 철학의 합의는 아니다. 자기를 지속하는 하나의 생물학적 개체로 보는 반대 진영도 있다. 여기서 빌리는 것은 실체를 덜어 낸 계보다.
면역학이 분자 기전에서 다다른 자리가 정확히 여기다. 자기는 실체가 아니라 과정이고(흉선 교육), 남과의 관계로 유지되며(Treg), 정도의 문제다. 그중 정도의 문제라는 대목을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 미세키메라다. 임신 중 아기의 세포가 엄마 몸으로 건너가 수십 년 남는다. 출산 뒤 최대 27년까지 혈액에서 검출되고, 뇌에서도 발견된다. 방향은 반대로도 흘러, 엄마의 세포가 자녀 몸에 성인기까지 남는다. 남의 세포가 수십 년 '자기'의 일부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파핏의 '정도로서의 정체성'을 몸에서 예시한다. 다만 파핏이 말한 정도는 심리적 연결의 문제이고 미세키메라는 세포 구성의 문제라, 둘이 같은 층위는 아니다. 철학 명제를 면역학이 증명했다는 말이 아니라, 정도로서의 자기라는 같은 꼴이 몸에서도 나타난다는 반향이다. 그 세포들이 조직 재생을 돕는지 자가면역에 얽히는지는 아직 연관 수준의 논쟁이다.
이 다리는 내가 지어낸 은유가 아니다. 다리를 놓은 것은 학계 자신이다. 타우버(Alfred Tauber)는 면역학이 말하는 '자기'가 확고한 이론이라기보다 은유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프라되는 면역계가 개체를 가르는 기준(연속으로 이어진 것은 견디고 갑자기 끊긴 것에 반응한다)을 생물학적 정체성 이론으로 정식화하고, 이를 로크에서 파핏으로 이어지는 인격 정체성 논의와 잇댔다. 예르네(Niels Jerne)는 노벨 강연에서 촘스키의 생성문법(유한한 규칙에서 무한한 문장이 나오는 언어 이론)을 빌려 면역계를 기술하고, 항체들이 서로를 알아보며 자기를 계속 인식하는 그물이라고 보았다(특이형 네트워크, 지금은 대체된 이론이지만 자기를 관계망으로 본 발상은 남았다). 에덜먼(Gerald Edelman)은 이 선택 원리를 뇌로까지 옮겨 신경다윈주의(항체 선택 원리를 뇌에 적용한 이론)를 세웠다.
그런데 이 다리를 놓은 쪽은 특정 학파(프라되로 대표되는 프랑스 면역철학)에 쏠려 있다. 게다가 빌림은 역사적으로 양방향이었다. 초기 면역학이 거꾸로 심리학의 '자기' 개념을 들여오기도 했다. 그러니 이 만남을 독립된 두 발견의 수렴으로 부풀릴 일은 아니다. 증명이라기보다, 양쪽 전문가가 서로의 정식화를 생산적으로 빌려 쓴 것이다. 철학은 면역 기전의 모양을 비추는 렌즈이지, 인격의 자기와 면역의 자기가 같은 실체라는 말이 아니다. 닮은 것은 문제의 구조이지 재료가 아니다.
자기는 남으로 지어진다
면역이 남을 견디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필요로 한다는 데까지 가면, 자기와 남의 경계는 더 흐려진다. 무균 상태로 기른 동물은 면역계가 미숙하게 자란다. 장의 림프조직이 작고 항체가 적다. 완전히 성숙하려면 숙주에 맞는 미생물이 들어와 면역을 가르쳐야 한다. '자기'의 면역 정체성은 안쪽 알맹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깥의 남과 계속 주고받는 관계 위에서 지어지는 것이다. 흄의 다발을 몸으로 옮기면 이렇게 읽힌다.
다시, 무엇을 견디고 무엇에 응답할까
처음의 물음, "면역계는 나를 어떻게 아는가"는 두 가지를 전제하고 있었다. 자기가 미리 주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기가 공격과 관용을 가르는 축이라는 것. 둘 다 흔들렸다. 자기는 흉선에서 만들어지고 평생 유지되는 것이라 주어져 있지 않고, 공격을 가르는 데는 신원만으로 부족하다. 신원은 필요조건이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맥락이다.
그래서 물음을 다시 세워야 한다. 면역계는 매 순간 무엇을 견디고 무엇에 응답할지 어떻게 정하는가. 결정적인 맥락 신호가 손상인지 미생물의 패턴인지 불연속인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그러나 답이 없어서가 아니다. 답의 모양이 우리가 찾던 것과 다를 뿐이다.
그 다른 모양은 이렇다. 면역학적 자기는 지켜야 할 본질이 아니다. 흉선에서 만들어지고, 말초에서 끊임없이 유지되고, 남을 견디다 못해 남으로까지 지어지는, 매 순간 다시 정해지는 관계다. self/non-self는 틀린 그림이 아니라 그 관계의 한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실체 없는 자기라는 이 결은 몸에만 머물지 않아서, 이해하는 주체가 정말 거기 있는지 물은 열람과 침묵 — 다 볼 수 있게 된 시대에, 비트겐슈타인이 가리킨 곳도 같은 자리에 선다.
가만히 보면 놀라운 것은 여기다. 우리 몸은 무엇이 자기인지 미리 알지 못한 채 태어나, 발생기에 그것을 스스로 새기고, 평생 수조 개의 세포를 상대로 무엇을 견디고 무엇에 맞설지 매 순간 다시 정한다. 한 번 잘못 새기면 제 몸을 공격하고(자가면역), 한 번 놓치면 감염과 암을 지나친다. 그 아슬아슬한 판정을, 몸은 대개 우리가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평생 해낸다. 결국 '나'는 가지고 태어나 지키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다시 지어내는 일이었다. 면역계라는 창으로 들여다본 인체의 신비는, 바로 그 쉼 없는 다시 짓기에 있다.
출처
- > 이 글이 근거로 삼은 1차·2차 문헌. 모든 링크 열람일: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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