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도시
큰 도시에 살수록 사람은 더 많이 가지고도 덜 만족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보다 넓은 집, 남만큼은 되어야 한다는 조바심. 우리는 흔히 여기에 도덕의 이름을 붙입니다. 탐욕. 도시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밟고 오르는 각축장이고, 그 각박함은 결국 개인의 마음이 부린 악덕이라는 것입니다.
이 통념을 떠받치는 설명은 대개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도시가 사람을 물들인다는 것입니다. 광고와 쇼윈도와 남의 시선이 넘치는 곳에서 마음이 소비주의에 젖는다는 이야기지요. 다른 하나는 반대로, 애초에 욕심 많고 야심찬 사람들이 큰 도시로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도시가 사람을 탐욕스럽게 만들거나, 탐욕스러운 사람을 끌어모으거나. 어느 쪽이든 탐욕은 개인의 문제로 남습니다.
그런데 만약 탐욕이 도시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그것도 도시를 부유하게 만드는 바로 그 장치로 만드는 것이라면. 도시를 부자로 만드는 엔진과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엔진이 실은 하나라면, 우리가 개인의 악덕이라 부르던 것의 정체가 달라집니다.

더 큰 집과 차를 좇아 다 같이 내달리지만, 아무도 앞서지 못하는 도시의 지위 경쟁. (AI 생성 삽화)
도시는 부호가 반대인 두 살림을 돌립니다
먼저 도시가 부를 어떻게 불리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인구가 많은 도시일수록 1인당 임금도, 1인당 특허도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흔한 설명은 "규모의 경제"입니다. 큰 살림이 알뜰하듯 도시도 커지면 더 효율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절반은 맞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절반에서 도시는 생물이 한 번도 하지 않는 일을 합니다.
크기가 커질 때 어떤 값이 몇 곱절로 커지는지를 나타낸 규칙을 스케일링이라 합니다. 인구가 두 배가 될 때 어떤 값이 정확히 두 배로 늘면 선형, 두 배보다 덜 늘면 저선형(규모의 경제·절약), 더 늘면 초선형(증폭)입니다. 그 기울기를 한 숫자로 압축한 것이 지수입니다. 1보다 작으면 저선형, 크면 초선형이지요.
생물은 저선형의 세계입니다. 몸이 클수록 세포 하나가 쓰는 에너지는 오히려 줄어듭니다. 기초대사율이 대체로 체질량의 4분의 3제곱에 비례하는, 지수가 1보다 작은 저선형입니다(정확한 값은 근사치입니다). 심장이라는 중앙 펌프가 관을 타고 세포 하나하나에 자원을 배달하는 구조라 그렇습니다. 규모가 커질수록 이 배달망에 병목이 생겨, 한 단위를 건사하는 비용이 싸집니다.
도시의 물리 인프라도 여기까지는 똑같습니다. 도로, 주유소, 전선은 인구가 두 배가 돼도 두 배까지는 필요 없는 저선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 눈을 돌리면 부호가 뒤집힙니다. 임금도 특허도 총생산도, 인구가 두 배가 되면 1인당 산출이 규모의 경제로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납니다. 한 몸에 절약형 살림(인프라)과 증폭형 살림(경제 산출)이 부호가 반대인 채로 겹쳐 돕니다.
막대 값 = 선형 기준(β=1.0)으로부터의 편차(β에서 1을 뺀 값) · 지표명 옆 βx.xx = 원 지수. 0 왼쪽 = 저선형(규모의 경제·인프라), 오른쪽 = 초선형(증폭·부·혁신). 인구 스케일링 지수 · 미국 대도시권 2001~2006년(전선만 독일 2002). 출처: Bettencourt et al. (2007) PNAS 104:7301; Bettencourt (2013) Science 340:1438.
부호를 뒤집는 급소는 크기가 아니라 연결입니다. 생물에서 자원은 심장에서 수동적인 세포로 일방향으로 배달됩니다. 도시에는 그런 중앙 심장이 없습니다. 도시의 세포인 사람은 배달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서로 만나고, 거래하고, 아이디어를 주고받습니다. 택배가 아니라 중고 직거래나 동네 품앗이에 가깝지요. 인구가 늘면 이 주고받는 기회, 곧 연결 밀도가 인구보다 빠르게 늘어납니다. 실제로 한 도시의 통신망에서 사람들 사이에 오간 상호작용의 총량 자체가 인구의 약 1.17제곱, 곧 초선형으로 는다는 것이 관측됐습니다. 도시가 부를 초선형으로 키우는 힘은 크기가 아니라 이 촘촘함에서 나옵니다.
여기까지가 원래 이야기의 뼈대입니다. 도시는 서로 주고받는 밀도로 부를 초선형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음이 남습니다. 도시가 부를 그렇게 키운다면, 그 부를 느끼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요. 부는 절대 액수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늘 누군가와 견주어 느껴지고, 그 누군가가 누구냐가 도시에서 달라집니다.
더 부유한 이웃이 눈앞에 있을 때
연봉 5천만 원을 받는다고 해봅시다. 어떤 동네에서는 넉넉한 살림이고, 강남 한복판에서는 초라한 형편입니다. 같은 숫자인데 느낌이 다릅니다. 사람은 자기 상태를 절대 수준이 아니라 어떤 기준점 대비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점을 준거점이라 하고, 사람의 판단이 절대량이 아니라 준거점에 매달리는 이 성질을 준거의존이라 합니다. 반세기 전에 세워진 개념이지요.
준거점·준거의존 ·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의 전망 이론(1979)에서 세운 개념.
준거점이 올라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여기에 하나가 더 겹칩니다. 사람은 같은 크기라도 이득의 기쁨보다 손실의 쓰라림을 더 크게 느낍니다 — 대략 두 배쯤 아프다는 손실회피입니다. 준거점이 높아질수록 어제와 똑같은 절대 소득이 손실 영역 쪽으로 미끄러지고, 가진 게 줄지 않았는데도 모자란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두 배'는 내 현재 상태를 기준으로 이득과 손실을 잰 값이지, 이웃을 기준점으로 삼는 사회비교에서도 똑같이 두 배가 측정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 방향만 빌려 온 유비이지요.
그렇다면 준거점은 무엇이 정할까요. 사람은 자기를 평가하려 남과 비교하고, 그중에서도 비슷한 사람과 비교합니다(사회비교). 게다가 어떤 가치는 절대량이 아니라 상대적 순위에서 나옵니다. 남이 오르면 내가 내려가는 제로섬이지요. 공연장에서 앞사람이 더 잘 보려고 일어서면 뒷사람도 따라 일어서고, 결국 다 같이 서서 아무도 더 잘 못 보고 다리만 아픕니다. 지위재의 예입니다. 순위를 좇는 경쟁은 이렇게 서로를 상쇄하며 모두를 지치게 합니다.
사회비교 · 레온 페스팅거(1954).
지위재 · 프레드 허시가 명명(1976)·로버트 프랭크의 예시.
여기까지는 실험실과 이론의 이야기입니다. 이 실험과 이론들은 도시를 논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밝힌 것은 마음의 배선이고, 그 배선을 도시의 밀도에 갖다 대는 것은 이 글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그 사슬을 도시의 공간에 직접 갖다 댄 현장 연구가 하나 있습니다. 한 경제학자는 미국의 가구 자료로, 같은 지역에 사는 이웃의 소득이 높을수록 본인의 소득을 통제한 뒤에도 스스로 매긴 행복이 낮아진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효과는 작지 않습니다. 이웃의 소득이 오르는 것은 같은 크기만큼 내 소득이 줄어드는 것과 비슷하게 행복을 깎아냈습니다. 게다가 그 효과는 이웃과 실제로 어울리는 사람에게서 크고, 동네 밖 친구하고만 어울리는 사람에게는 약했습니다. 준거점이 바로 눈앞의 이웃이라는 뜻입니다.
이 현장 연구 · 경제학자 루트머(2005)의 이웃 소득·행복 연구.
여기 이음매를 하나 짚고 갑니다. 요즘 비교의 창은 담장 너머가 아니라 손안의 화면이고, 진짜 준거점은 도시가 아니라 미디어가 정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지만, 그 현장 연구는 미디어를 재지 않아 그 반론의 반박이 되지 못합니다. 그 연구가 실제로 가른 쌍은 학력입니다. 같은 학력의 이웃이 더 벌 때 행복이 깎였고, 다른 학력의 이웃 소득에는 거의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본 어울림의 갈림과 나란히 놓으면, 두 갈래는 준거집단이 좁아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조건이 붙는다고 말합니다. 이웃이 준거점 노릇을 하는 힘은 실제로 어울릴수록, 나와 닮을수록 세집니다. 미디어가 창을 하나 더 연다 해도, 본인 소득을 걷어낸 뒤에도 남은 이웃이라는 창은 닫히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이 글의 해석입니다. 밀도가 건드리는 것은 그중 첫째 조건, 어울릴 기회의 수입니다. 그렇다면 도시가 하는 일은 준거점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닮은 사람을 마주칠 기회를 늘리는 것입니다. 다만 남겨 둘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그 현장 연구가 보인 것은 '이웃의 소득이 중요하다'까지이지, '밀도가 높을수록 비교가 그만큼 세진다'는 눈금까지는 아닙니다. 방향은 뚜렷해도 '얼마나'의 용량-반응은 아직 얇게만 그려져 있습니다.
이제 사슬이 다 이어집니다. 밀도가 높은 도시일수록 더 부유한 이웃이 더 가깝고 더 자주 눈에 들어옵니다(사회비교). 그럴수록 준거점이 올라가고(준거의존), 준거점이 올라갈수록 같은 절대 소득이 손실 영역으로 미끄러지며(손실회피), 그만큼 결핍이 커집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 결핍이 부의 엔진과 따로 도는 부작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만나고 견주는 그 촘촘함은 부를 초선형으로 키운 바로 그 변수이고, 비교는 그 엔진이 함께 돌려 낸 산출입니다. 도시가 부를 초선형으로 키우는 그 촘촘함이, 동시에 그 부를 초라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둡니다. 도시와 마음을 잇는 다리는 지수가 아니라 인과 사슬입니다 — 도시라는 변수(밀도)가 개인 마음의 입력(준거점)을 밀어 올리고, 그렇게 바뀐 개인들이 모여 사회의 결을 이룹니다. 개인 심리의 실험을 도시 통계에 곧장 외삽한 이야기와는 층위가 다릅니다.
한 엔진, 두 얼굴
두 얼굴은 한 장면에서 갈립니다. 더 부유한 이웃이 눈앞에 보일 때, 나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합니다. 더 초라하게 느끼고(상대적 박탈), 더 분투합니다(야망).
여기서 이 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를 제안합니다. 준거점을 넘어서려는 그 분투가 상호작용의 밀도 — 더 오래 일하고, 더 위험을 감수하고, 더 촘촘한 곳으로 모여드는 — 를 스스로 키우는 연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스케일링 문헌이 확립한 사실이 아니라 이 글의 가설입니다. 혁신의 초선형은 지위를 향한 분투와 무관하게, 사람이 촘촘히 모이면 아이디어가 저절로 번지는 순수한 지식 스필오버만으로도 굴러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연료 가설은 접어 두어도 좋습니다.
접어 두어도 논지는 섭니다. 가설보다 약하지만 더 단단한 바닥이 하나 남기 때문입니다. 도시를 부유하게 만드는 그 촘촘함 — 사람들이 가깝고 자주 눈에 띄는 그 근접과 가시성 — 이, 동시에 결핍의 준거점을 밀어 올립니다. 부를 키운 변수와 결핍을 키운 변수가 같은 하나라는 것, 이 약한 읽기만으로도 '같은 밀도'는 성립합니다. 준거의존은 그 밀도가 사람 마음에 닿는 지점이지, 엔진에 잘못 낀 결함이 아닙니다. 도시를 부유하게 만드는 야망과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탐욕은, 이렇게 같은 밀도 기질을 나눠 쓰는 두 얼굴입니다.
원래 이야기에는 이 대칭의 씨앗이 이미 있었습니다 — 앞에서는 접어 두었던, 원 논문의 다른 발견입니다. 도시가 아이디어와 임금을 촘촘함으로 초선형으로 키운다면, 같은 촘촘함을 타고 전염병도 과부하도 늘 것이라는 예측, 곧 창의성 기계가 병리의 증폭기이기도 하다는 어두운 대칭이었지요. 이 대칭이 이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재연됩니다. 도시는 부를 초선형으로 키우는 만큼 만족을 갉습니다. 소득이 올라도 준거점이 함께 올라가니, 러닝머신 위를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제자리인 것과 같습니다. 이 제자리걸음을 쾌락의 러닝머신이라 부릅니다. 큰돈이 굴러들어온 복권 당첨자조차 얼마 지나면 당첨되지 않은 이웃보다 딱히 더 행복하지 않더라는 오래된 관찰이 이 제자리걸음을 가리킵니다.
병리 쪽의 정확한 지수는 더 엄밀한 통계에서 오히려 논쟁적입니다.
이 복권 당첨자 관찰은 표본이 작아 강한 증거가 아니라 이미지로만 받아들일 일입니다.
이 논지에는 미리 짚어 둘 경계가 몇 있습니다. 우선 이 글은 탐욕에 지수를 붙이지 않습니다. 원래 이야기가 병리 쪽 초선형에 확정된 지수 매기기를 유보한 것과 똑같은 정직입니다. 이 글이 단언하는 것은 값이 아니라 엔진의 방향뿐입니다.
특히 조심할 대목이 있습니다. "도시 사람이 객관적으로 더 불행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소득이 높으면 행복도 대체로 높아진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습니다. 한 연구는 나라 안에서도 나라 사이에서도 절대소득이 행복과 뚜렷이 상관하며, 부유해질수록 행복이 멈추는 포화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앞의 러닝머신과 어긋나 보이지만, 둘은 다른 축을 잽니다. 러닝머신과 복권 당첨자는 한 개인이 시간을 두고 변화에 적응하는 세로축의 이야기이고, 그 연구는 여러 나라를 한 시점에 늘어놓고 소득과 행복을 견주는 가로축의 이야기입니다. 절대소득이 후생을 올린다는 것과, 오른 소득에 마음이 이내 적응한다는 것은 부딪히지 않습니다. 논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 상대소득이 그 후생을 상쇄해 깎아내리는가라는 집계 질문에는 아직 어느 편도 승패가 갈리지 않았습니다. 이 글이 딛는 것은 그 집계 결론이 아니라, 준거의존과 사회비교가 실험과 현장에서 강건하다는 사실, 그리고 밀도가 준거점의 가시성을 높인다는 방향, 이 둘뿐입니다.
이 연구 · 스티븐슨과 울퍼스(2008).
이 집계 질문에서는 이스털린의 오랜 역설과 그 반박이 팽팽합니다.
선별은 어떨까요. 야심찬 사람이 애초에 대도시로 모여든다는 반론 말입니다. 선별은 실재합니다. 다만 판별의 무게는 공변이 아니라 통제 후에 남는 것에 실립니다. 스페인의 대규모 행정 자료로 노동자 개개인의 숨은 능력까지 걷어내도, 도시 규모가 주는 임금 효과의 절반가량은 사라지지 않고 남습니다. 그 이웃 효과 역시 본인 소득과 개인 특성을 통제한 뒤의 값입니다. 밀도가 능력이나 성정과 별개로 제 몫을 한다는 뜻이지요. 물론 이것으로 선별이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 다만 이 잔존분까지 선별만으로 설명하려 들면 옹색해집니다. 좋은 것(야망·혁신)과 나쁜 것(탐욕·결핍)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관찰은 그 자체로는 공통 엔진을 확정하지 못합니다(지위를 좇는 한 가지 성향이 도시로 쏠려도 같은 공변이 나올 테니까요). 그 관찰은 방증일 뿐이고, 무게를 지는 것은 통제 뒤에도 남는 밀도의 몫입니다.
공변 · 두 값이 나란히 움직이는 것. 함께 움직인다는 관찰만으로는 어느 쪽이 원인인지, 아니면 둘 다 제3의 원인에 끌려다니는 것인지 가려지지 않습니다.
이 엔진은 도시 안에서 고르게 돌지도 않습니다. 누가 촘촘함의 이득(더 높은 임금)을 얻고 누가 그 그림자(더 무거운 결핍)를 무는지는 계층과 동네에 따라 갈립니다. 도시를 한 점으로 뭉뚱그린 스케일링 곡선은 그 안쪽 분배까지는 보여 주지 못합니다.
탐욕을 만드는 도시
그래서 「탐욕의 도시」라는 말의 뜻이 처음과 달라집니다. 그것은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모인 도시가 아니라, 탐욕을 만들어 내는 도시입니다. 우리가 개인의 악덕이라 부르던 결핍감은, 도시를 부유하게 만드는 바로 그 연결 밀도가 준거점에 기대는 마음에 남긴 구조적 그림자였습니다. 혁신을 키운 그 밀도가 함께 키운 것이지요.
여기서 두 가지가 따라 나옵니다. 첫째, 개인을 탓하는 도덕화는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물론 개인차는 실재하고, 절제하는 사람이 덜 휘둘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방향을 인정한다고 개인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준거의존은 의지가 아니라 마음의 기본 배선이고, 밀도는 그 배선이 딛는 기준점을 인구 전체에 걸쳐 밀어 올립니다. 자족을 설교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둘째, 좋은 것만 떼어 갈 수 없습니다. 혁신을 키운 그 밀도가 결핍도 함께 키우는 한, 혁신만 남기고 결핍만 도려내는 처방은 엔진 자체와 싸우는 셈이라 집니다.
그렇다면 지렛대는 마음의 절제가 아니라 연결의 구조에 있습니다. 누가 누구와 무엇을 비교하게 되는가, 준거점의 가시성을 어떻게 짜고 촘촘함이 낳은 이득과 그림자를 어떻게 나누는가의 문제이지요. 문제는 개인의 탐욕이 아닙니다. 밀도의 기하학입니다. 손볼 자리도 거기입니다.
원래의 이야기는 도시가 큰 생물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서 있다고 했습니다. 자원을 중앙에서 배달하는 몸이 저선형으로 절약하는 자리에서, 서로 주고받는 도시는 초선형으로 증폭한다고. 이제 하나를 더 보탤 수 있습니다. 도시는 생명의 규칙만 거꾸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만족의 규칙도 거꾸로 씁니다.
출처
- Bettencourt, L.M.A., Lobo, J., Helbing, D., Kühnert, C., West, G.B. (2007). "Growth, innovation, scaling, and the pace of life in cities." PNAS 104(17):7301–7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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