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람과 침묵 — 다 볼 수 있게 된 시대에, 비트겐슈타인이 가리킨 곳
검색창에 무엇이든 치면 답이 나온다. 이제는 없던 문장도 생성된다. 지도는 처음 가는 골목까지 펼쳐 보여주고, 오래전 죽은 사람의 목소리도 복원된다. 다 볼 수 있다는 감각. 그런데 한 사람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을 다 알고도, 정작 그가 나에게 무엇인지, 내 삶이 어디로 가는지, 왜 이것이 중요한지는 아무리 열람해도 열리지 않는다.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많아졌는데, 어떤 것들은 여전히 조회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앞의 침묵은 아직 데이터가 모자란 탓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명제 7을 다시 읽다
100년 전 한 철학자가 얇은 책 한 권을 닫으며 이렇게 썼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1) 마지막 명제 7이다. 독일어 원문은 "Wovon man nicht sprechen kann, darüber muß man schweigen". 오그던은 "그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로, 피어스와 맥기니스는 "말없이 지나가야 한다"로 옮겼다. 번호가 붙은 명제들로 조립된 이 책은, 부속 설명 하나 없는 이 한 문장으로 끝난다.
흔히 이 문장은 '검증할 수 없는 것은 헛소리이니 폐기하라'는 실증주의의 구호로 소비된다. 그러나 이 독법은 비트겐슈타인을 거꾸로 세운다. 빈 학파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은 버려야 할 무의미였지만, 비트겐슈타인에게 그것은 폐기물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명제 7이 침묵하라고 한 대상은 시시한 헛소리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무지도 아니다. 그 침묵이 무엇을 향하는지 알려면, 책이 앞에서 그어둔 한 선을 따라가야 한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지다. 훗날 그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넘어서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의 몫이 아니다.)
말해진 것과 보여지는 것
『논고』는 언어를 세계의 그림으로 본다. 명제는 사실을 그린다. "고양이가 매트 위에 있다" 같은 문장은 세계의 한 상태를 옮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낯선 구분을 세운다.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말해지지 않고 다만 보여지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명제는 자신의 논리적 형식 —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짜였느냐 — 을 진술하지 못한다. 그 형식은 명제 안에서 스스로 비칠 뿐이다. 그래서 그는 못 박듯 적는다.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 오해하기 쉬운 대목이 여기다. 보여지는 것은 숨어 있어서 못 보는 게 아니다. 오히려 훤히 드러나 있다. 다만 명제로 붙들리지 않을 뿐이다.
책의 끝머리에서 이 구분은 신비(das Mystische)에 닿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다." 여기서 신비는 안개 낀 신령스러움이 아니다. 세계가 어떠하냐가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 자체다. 그리고 그와 한 계열에 삶의 의미와 윤리와 가치가 놓인다. 명제로 붙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만 삶 속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것들. 예술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좋은 음악이나 시는 무엇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이 윤리와 미학은 하나라고 적은 것도 이 자리에서다.
여기가 갈림길이다. 보여지는 것은 열람의 대상이 아니다. 조회할 데이터베이스가 없다. 그것은 접근되지 않는다. 드러날 뿐이다. 검색으로는 잡히지 않고, 다만 살아진다. 접근과 이해가 갈라지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열람이 닿지 못하는 곳
비트겐슈타인은 이 갈림을 단 한 문장으로 못 박는다.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에 답이 주어지더라도, 삶의 문제는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았다고 우리는 느낀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남김없이 다 모아도, 그 총합이 삶의 문제를 풀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다. 애초에 그것은 과학적 물음이 답하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해는 말자. 열람이 이해에 아무 보탬도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것 안에서는 열람이 이해를 늘린다. 친구가 나를 피한다고 오해했다가, 그가 상을 당했음을 알고 오독을 거둔다. 데이터는 편견을 바로잡고, 통계는 직관의 착각을 교정한다. 열람은 사실의 영역에서 분명히 일한다. 다만 그 영역에는 천장이 있다. 한 사람에 관한 사실을 아무리 모아도 — 검색 기록, 위치 이력, 얼굴을 인식한 수천 장의 사진 — 그 총합은 그가 나에게 무엇인지, 이 관계가 무슨 의미인지를 건네지 않는다. 앞의 것은 열람되는 사실이고, 뒤의 것은 6.52가 가리킨 자리다. 비트겐슈타인이 가치를 두고 한 말이 여기 겹친다. "윤리는 말로 표현될 수 없다. 윤리는 초월적이다." 여기서 초월적이란 세계 너머 어딘가에 값이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라, 값이 세계 안의 사실들 틈에는 없다는 뜻이다. 옳음도, 한 삶이 값진가도, 세계 안의 사실을 아무리 긁어모아도 그 안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검색엔진도 생성 모델도 알지 못했다. 그가 그은 선은 어디까지나 언어와 세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선을 우리 시대로 끌어오는 것은 그의 주장이 아니라 나의 읽기다. 다만 그 선은 100년을 건너와 지금 더 날카롭게 벤다. 열람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열람할 수 없는 것을 없는 셈 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침묵, 그리고 물러나는 국경선
그래서 침묵을 둘로 갈라야 한다.
하나는 무지의 침묵이다. 아직 몰라서 다무는 입. 이 침묵은 데이터의 공백이라 조회하면 메워진다. 검색 한 번, 질문 한 번으로 말이 된다. 우리 시대가 눈부시게 잘하는 일이 바로 이 침묵을 없애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계 앞의 침묵이다. 원리상 말로 옮길 수 없는 것 앞에서의 침묵. 명제 7이 명한 것은 이쪽이다. 이 침묵은 채워야 할 빈칸이 아니라, 말이 닿는 영역의 가장자리를 표시하는 선이다.
열람의 시대가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두 번째 침묵을 첫 번째로 오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보가 부족해서 생기는 실수가 아니라, 범주를 잘못 짚은 실수다. 색깔의 무게를 저울에 달려 하거나 화요일이 몇 미터냐고 묻는 것처럼. 삶의 의미를 검색하고, 한 사람을 프로파일로 재구성한다. 윤리마저 알고리즘으로 출력하려 든다. 데이터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물음의 종류가 틀렸다.
그런데 열람의 시대가 부리는 진짜 수법은 따로 있다. 한계 앞의 침묵을 그저 오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끊임없이 무지의 침묵으로 바꿔치기한다는 것이다. fMRI가 정동을 읽어내고, 감정 분석이 사랑을 점수로 환산하고, 언어 모델이 슬픔을 유창하게 설명한다. 그럴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아직 스캔되지 않은 것'으로 재분류된다. 국경선이 자꾸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보여질 뿐이던 것이 하나씩 말해진 것의 목록으로 옮겨 적히는 착시. (그 설명들이 정말로 그것을 건넸는지는 다른 물음이다. 언어 모델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정교하게 재조립하지만, 보여질 뿐인 것을 건네지는 못한다.)
이 착시에 가장 깊이 빠지는 사람은 가장 적게 보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이다. 볼 것이 넘칠수록, 보이지 않는 것마저 그저 아직 안 뜬 항목처럼 보인다. 풍요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지우지 않는다. 그것을 결함으로, 곧 채워질 공란으로 다시 프레임한다. 그래서 가장 많이 열람하는 사람이 접근과 이해를 가장 헷갈리기 쉽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방식조차 예외가 아니다. 열람의 한계를 논한 이 글마저 비트겐슈타인을 조회하듯 정보로 훑고, 그 훑음을 이해라고 느낀다면, 방금 말한 그 착시를 한 번 더 재연하는 셈이다.
사다리와 여운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이 한계를 어떻게 마주했나. 그는 자기 책마저 이 선 위에 올려놓는다. 명제 6.54에서 그는 나를 이해한 사람은 결국 내 명제들이 무의미함을 알아차린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뒤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굳이 말로 가리켜 보인 이 책조차, 다 오르고 나면 버려야 할 사다리라는 것이다.
정직하게 밝혀두자. 나는 지금 비트겐슈타인을 표준 독법으로 읽었다. 보여질 뿐인 것이 실재한다고. 그것을 아예 부정하는 근래의 독법도 있다. 가리킬 무언의 진리 따위는 없고, 명제 7의 침묵은 신비화를 그만두라는 치료일 뿐이며, 그 독법은 말해진 것과 보여지는 것의 구분마저 사다리와 함께 내다 버린다. 어느 쪽이 옳은지의 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승부에 이 글의 전부를 걸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앞의 자리에 서 있었음은 밝혀 둔다. 그리고 이 글 역시 사다리다. 보여질 뿐인 것을 말로 둘러 가리켰으니, 쓸모를 다하면 버려야 한다.
그가 책 바깥에 남긴 한마디는 오래 남는다. 출판을 주선해줄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기 작업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 쓴 것과, 쓰지 않은 모든 것.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쓰지 않은 두 번째 부분이라고.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정보를 줄이는 일은 답이 아니다. 덜 검색한다고 이해가 느는 것도 아니다. 어려운 것은, 눈앞의 침묵이 어느 쪽인지 미리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한때 번개는 신의 몫이었다가 지금은 남김없이 말해진다. 어떤 한계는 뒤에 무지였음이 밝혀진다. 그러니 두 침묵을 가르는 일은 한 번 익히면 끝나는 기술이 아니라, 매번 새로 거는 내기다. 틀릴 각오 없이는 걸 수 없고, 그 각오가 이해의 조건이다. 열람이 총체가 될수록 이 내기는 자꾸 무지 쪽으로 기운다. 다 볼 수 있으니 다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다 볼 수 있게 된 시대에, 비트겐슈타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아직 조회되지 않은 다음 페이지가 아니다. 페이지가 끝나는 자리, 그 너머다.
- 1차 텍스트 —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Tractatus, 1921/1922)
- 명제 7·4.121·4.1212·6.41·6.42·6.421·6.44·6.45·6.5·6.52·6.521·6.522·6.53·6.54 — Ogden 영역판 (Project Gutenberg) · Wikisource
- 독일어 원문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 Wittgenstein Project
- 사전·해석
- Ludwig Wittgenstein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aying/showing 구분·das Mystische·전기/후기·resolute 독법)
- James Conant, "Mysticism and Nonsense in the Tractatus" (resolute 독법)
-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 Wikipedia
- 번역·수용
- 명제 7 번역 이본(오그던 vs 피어스·맥기니스) — Peter Caws, "Tractatus 7: Translation and Silence" (Philosophy Now #58)
- "쓰지 않은 부분이 더 중요하다" — 루트비히 폰 피커(Ludwig von Ficker)에게 보낸 편지(1919)의 취지
- > 이 글은 AI와 함께 다차원으로 분석, 검증하고 집필자가 검수했습니다.